Sunday 15th November 2020,
최윤섭의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칼럼] 혁신을 정말 원한다면, 혁신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을

* 한국경제신문에 기고한 칼럼의 원문입니다. 글자수 제한으로 지면에는 원글의 분량의 1/3만 나갔습니다. 

최근 필자는 영국, 노르웨이, 덴마크 등 몇몇 대사관에서 한국의 디지털 헬스케어를 소개해줄 수 있냐는 요청을 받았다. ‘K-방역’의 성공에 힘입어, 한국의 디지털 헬스케어에 대해서도 관심이 커진 모양이었다. 여러 국가에 한국의 디지털 헬스케어 생태계를 알릴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필자는 이런 요청을 모두 고사할 수밖에 없었다. 영어 실력에 자신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한국의 디지털 헬스케어 생태계가 매력적인 이유, 혹은 외국 기업이 한국 시장에 진출해야 하는 설득력 있는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 주변의 다른 전문가들도 해당 요청을 받았지만, 같은 이유로 고사했다고 들었다.

한국 디지털 헬스케어 시장은 글로벌과 동떨어진 갈라파고스이며, 글로벌 기업에게 결코 매력적이지 않은 시장이다. 이유는 다양하다. 작은 시장, 산업보다는 복지에 편중된 의료 정책, 과도한 규제와 보수적인 수가 등등. 이런 이유로 글로벌 기업에게 한국 시장에 대한 우선 순위는 극히 낮을 수밖에 없다. 2018년 개발된 애플워치의 심전도 및 부정맥 기능이 전 세계 30여개 국에 도입된 이후에야 최근 한국에 들어왔고, 모바일 헬스케어 아이콘 중 하나인 스마트폰 심전도 측정기 얼라이브코 역시 2012년 FDA 인허가 이후로 전 세계 각국에 서비스를 해오다가 한국에는 올해가 되어서야 진출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반면 최근 독일의 디지털 헬스케어 정책을 보면 부럽기 그지 없다. 독일은 작년 말, ‘디지털 헬스케어 특별법 (Digital Health Act)’을 제정하여 디지털 헬스케어 앱이 인허가를 받기만하면 최소 12개월, 최장 24개월 동안 국영 의료 보험에서 임시 수가를 주는 파격적인 결정을 했다.[1,2] 즉, 인허가를 통해서 헬스케어 앱의 안전성과 유효성이 증명되었다면, 앱의 비용효과성에 대해서는 시장에서 사용하면서 증명할 수 있도록 12개월 동안 국가에서 지원해주는 것이다. 독일뿐만 아니라, 최근 프랑스, 벨기에 등에서도 유사한 수가 정책을 시작했다.

이러한 독일의 새로운 규제 시스템은 흥미롭게도 독일어뿐만 아니라, 영문으로도 제작되어 배포되었다. 독일법 전문가에 따르면 이는 해외 기업들을 독일에 유치할 수 있도록 독려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아닌게 아니라, 이후로 독일의 디지털 헬스케어 전문가들은 자국의 우호적인 정책적 환경을 근거로 글로벌 시장에서 독일을 우선적으로 고려해달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즉, 한국과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의 기술적, 산업적 혁신이 폭발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이를 규제하고, 평가하며, 관리하는 방식의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해졌다. 지금도 디지털 치료제, 디지털 표현형, 전자약 등 전에 없던 새로운 분야가 생기고 있으며, 이러한 혁신은 최근 원격의료, 사물인터넷, 클라우드 등과 융합되어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변혁는 이제 그저 초입에 들어섰을 뿐이다.

단순히 새로운 기술에 대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근본적인 속성이 달라지고 있으므로, 합리적으로 규제하고 혁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완전히 새로운 규제의 틀과 정책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규제 선진국들은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미국 FDA는 디지털 헬스케어를 전담하는 부서를 신설했을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 의료기기의 특성에 맞게 의료기기가 아닌 제조사를 규제하는 근본적인 변화를 꾀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이 인허가 이후에 의료 현장에서 사용하면서 데이터를 계속 학습하고 변화하는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규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디지털 치료제의 경우, 코로나 상황에서 비대면과 인구 수준의 확장력이라는 특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인허가 과정을 과감히 면제해주기도 했다. 독일과 프랑스 등의 파격적 수가 정책도 헬스케어 앱의 속성을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이러한 근본적 고민을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지난 2018년 이후, 식약처에서 인허가받은 인공지능은 60여개에 달하지만, 이 중에 국민건강보험의 수가를 받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들은 모두 기존 기술로 분류되어, 심지어 신의료기술평가의 대상조차 되지 못한다. 때문에 세계적 수준의 기술을 가진 의료 인공지능 회사들의 살아남을 길을 고심하고 있다.

그런데 인공지능 의료기기 수가 기준은 ‘기존’의 심평원 정책에 지극히 부합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기술 혁신들이 수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기존의 방식대로 제 역할을 다 했기 때문에, 그 결과 역설적으로 혁신이 저해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게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동작했음에도 그 결과가 목적한 방향성과 다르다면, 문제는 결국 그 시스템에 있다.

정책은 목적과 방향성이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 한국의 혁신 분야 정책은 그야말로 모순적이다. 소위 4차산업혁명, 인공지능 대한민국, 혁신 성장, 디지털 뉴딜 등을 주창하지만, 정작 그 핵심에 있는 디지털 헬스케어의 장려는 커녕 고질적인 문제들이 전혀 해결되지 못한채 몇년째 공회전만 반복하고 있다. 혁신의료기기법, 규제샌드박스 등 새로운 정책이 시도되고 있으나 모두 수가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다. 최근 언급되는 디지털 뉴딜도 핵심을 빗겨나 있기는 마찬가지다. 더구나, 의료 보장성 강화 기조에 따라 비급여가 축소되며 새로운 기술의 시장 진출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특혜를 줘야한다는 것이 아니다. 정책의 목적과 방향성, 그리고 우선순위에 맞게 일관성 있는 지원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독일의 디지털 헬스케어 특별법이 제정된 배경에는 의료 분야의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는 목적과 방향성이 있다. 독일은 그동안 다른 분야에서 디지털화가 빠른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의료 분야만큼은 더 이상 뒤쳐질 수 없다는 위기감에 전폭적인 정책적 지원을 결정한 것이다.

그에 반해 한국은 겉으로는 4차산업혁명과 유니콘을 외치면서, 현장의 정책과 규제 프레임워크는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 결과 전세계 50여 개의 디지털 헬스케어 유니콘 중에 한국 회사는 단 하나도 없고, 미국에서는 원격진료에 올해 2조원의 벤처 투자가 집행되었지만 국내에서는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불법이며, 식약처에는 여전히 디지털 헬스케어 전담 부서조차 없고, 식약처 허가 받은 60여개의 인공지능은 수가는 커녕 신의료기술평가 대상도 되지 못하는 것이다.

한국이 진실로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의 혁신을 원한다면, 혁신에 맞는 새로운 시스템이 필요하다. 혁신을 반영하지 못한 기존 시스템은 제대로 동작할수록 혁신을 오히려 더 가로막을 뿐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고쳐 쓰더라도 머지 않아 또 다른 한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혁신을 어떻게 규제하고 장려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제로 베이스에서 해야할 때이다.

About The Author

IT와 헬스케어의 컨버젼스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화두로 삼고 있는 융합생명과학자, 미래의료학자, 기업가, 작가, 엔젤투자가, 에반젤리스트입니다. 포항공대에서 컴퓨터공학과 생명과학을 복수 전공하였고, 동대학원에서 전산생물학으로 이학박사를 취득했습니다. 현재 최윤섭 디지털 헬스케어 연구소의 소장이며, 헬스케어 전문 스타트업 엑셀러레이터 디지털 헬스케어 파트너스 (DHP)의 대표 파트너를 맡고 있습니다. 성균관대학교 삼성융합의과학원 디지털헬스학과 겸임교수이자, VUNO, 3billion, 서지컬마인드 등의 스타트업의 자문을 맡고 있습니다. 네이처의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자매지 『npj 디지털 메디슨』의 편집위원이자, 식약처, 심평원의 전문가 협의체 자문위원입니다. 『디지털 헬스케어: 의료의 미래』 『의료 인공지능』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그렇게 나는 스스로 기업이 되었다』 등을 집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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