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24th March 2024,
최윤섭의 디지털 헬스케어

인공지능은 의사를 대체하는가

우리는 지금까지 다양한 의료 인공지능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중에는 아직 검증이 덜 되었거나 여전히 개발 중인 것도 있지만, 때로는 인간 전문의 수준과 동등하거나 일부 측면에서는 더 나은 것도 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의료 인공지능이 앞으로 더욱 발전할 것이며, 발전의 속도는 갈수록 더욱 빨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발전하는 의료 인공지능은 이미 의료계 내외에서 복잡한 이슈를 낳으며 주목받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공지능이 의사를 대체할 수 있는지에 관한 논쟁이다. 또한, 인공지능이 의료사고를 내면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지, 혹은 의료 인공지능의 정확성과 효능, 안전성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많은 의견이 있다. 이러한 이슈들은 의료계뿐만이 아니라, 규제기관, 법조계, 교육계, 심지어 철학계에서도 관심을 표하고 있다.

사실 이런 복잡한 이슈에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오히려 그 정답은 우리에게 달려있다. 의료 인공지능은 지금도 활발하게 연구개발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기술이다. 그 발전 과정에서 우리가 어떠한 방향으로 접근하며, 어떤 구도에서 평가할 것인지에 따라 의료 인공지능의 미래는 상당히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현명한 방향을 잡기 위해서는 의료 인공지능에 대해 보다 현실적인 시각이 필요하다. 앞서 우리는 의료 인공지능의 현주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인공지능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만능은 아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특정 영역에서 인간 의사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이미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의료 인공지능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환상도 금물이지만, 또 그 영향력을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것도 결코 현명한 일은 아닐 것이다.

지금부터는 의료 인공지능이 일으키는 몇 가지 주요한 이슈들에 대해서 논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로 살펴볼 이슈는 아마도 가장 이목이 쏠리는 문제일 것이다. 바로 인공지능이 정말로 의사를 대체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80%의 의사를 대체한다?

이 챕터의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인공지능의 의사 대체 가능 여부 문제에 대해서 가장 유명한 발언은 비노드 코슬라(Vinod Khosla)의 “인공지능이 80%의 의사를 대체한다”는 발언이다. 이 발언은 2012년 처음 나온 것인데, 여전히 미국 현지에서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이다.

필자는 사실 현재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이 글을 집필하는 중이다. 에릭 토폴 박사가 소장으로 있는 스크립스 중개과학연구소(Scripps Translational Science Institute)가 주최하는 디지털 의료 관련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미국에 머물고 있다. 마침 이 학회 행사 중 어제 다름 아닌 비노드 코슬라가 초청되어 에릭 토폴 박사와 대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대담에서도 “80% 의사 대체” 발언은 여전히 높은 관심을 받았다. 비노드 코슬라는 그 외에도 의료의 미래에 대한 과감한 발언들을 여지없이 쏟아내었다.

코슬라 이외에도 또 다른 흥미로운 발언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딥러닝 4대 천왕’ 중의 한 명인 토론토 대학의 제프리 힌튼 교수의 이야기다. 그는 2016년 한 인공지능 행사에서 “영상의학과 전문의를 양성하는 것을 당장 그만둬야 한다. 5년 안에 딥러닝이 영상의학과 전문의를 능가할 것은 자명하다” 고 구체적인 진료과와 기간까지 특정하여 이야기했다. 필자가 이 영상을 발견하여 페이스북에 공유했을 때 의료 전문가들 페이스북 친구들 사이에서도 반향이 뜨거웠다.

자. 더 논의를 진행하기에 앞서서 독자들은 먼저 이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보자. 답은 예/아니요 중에 하나로 해야 한다.

인공지능은 의사를 대체할 수 있을까?

만약에 이 질문에 예/아니요로 대답해야 한다면, 필자는 아마도 ‘예’를 택해야 할 것 같다. 필자가 강의에서 이 질문을 청중에게 물어보면 (의사를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도) 예와 아니오, 모두에 손을 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이 질문 자체가 별로 좋은 질문이 아니다. 올바른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올바른 답을 얻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질문을 아래와 같이 조금 더 바꿔보는 것은 어떨까?

인공지능이 의사를 ‘모두’ 대체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는 아마도 ‘아니오’라고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질문도 그리 좋은 질문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대체’라는 과격한 표현에 너무 신경을 쓰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의사라는 직업은 단 한 가지의 역할만을 하지는 않는다. 일단 의사의 역할은 내과, 외과, 소아청소년과, 안과, 이비인후과 등 다양한 전공으로 나누어져 있다. 또 개별 진료과에서 의사가 하는 역할도 매우 다양하다. 심지어 이는 임상 진료를 하는 의사의 역할에만 국한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진료 외에도 의사가 전문적인 의학적 지식과 역량을 바탕으로 사회에서 하는 일들은 의료 기술 개발, 신약 개발부터 사업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러므로 의사를 대체한다는 문제는 ‘인공지능 때문에 100명의 의사 중에 80명이 일자리를 잃는가’의 구도로 접근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대신, 의사가 맡은 개별적인 여러 세부 역할을 기준으로 접근하는 것이 이 문제의 해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인공지능이 의사의 역할을 크든 작든 변화시킬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의 도입에 따른 의사의 역할 변화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 사라지는 역할
  • 유지되는 역할
  • 새로운 역할

흔히 인공지능의 영향에 따라서 사라지는 역할에만 집중하기 쉽다. 관련 토론을 보더라도 ‘무엇이 사라질 것인가’를 중심으로 논의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러한 과정에서도 계속 유지되는 역할과 무엇보다도 새롭게 생겨나는 역할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라지는 역할보다는 오히려 후자의 유지되는 역할과 새롭게 맡게 되는 역할에 집중해야 한다.

특히 이러한 세 가지 역할의 구분은 진료과별로 따로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떤 진료과는 사라지는 역할의 비중이 특히 클 수도 있고, 또 다른 진료과는 유지되는 역할이나, 새롭게 생겨나는 역할의 비중이 클 수도 있다. 나중에 더 강조하겠지만, 이러한 변화에 발맞춰 의과대학의 교육 과정이나, 인턴이나 레지던트 등 의사들의 수련 과정에도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자동 마취 기계와 러다이트 운동

인공지능의 영향으로 나뉘는 세 가지 역할을 더 논의하기 전에, 노파심에서 한 가지를 더 강조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바로 이러한 변화의 흐름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의료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한 의료계의 대처 방안 중에 그 발전이나 도입을 막는다는 옵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는 단기적으로는 가능한 옵션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의료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국내외를 불문하고 의료계에서는 변화에 저항하기 위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시로 바로 존슨앤드존슨의 수면 마취 유도 장치인 세데시스(Sedasys)의 사례를 들 수 있다[1, 2, 3]. 세데시스는 결장 검사 및 내시경 검사 때 마취약을 자동으로 주사해 환자의 수면 마취를 유도하는 의료용 장비다. 또한, 중간에 환자가 깨지 않도록 심박수, 산소포화도, 심전도, 혈압 등의 활력 징후에 따라 투약량을 조절한다[ref].

sedasys-system-robot-doctor-johnson

FDA는 2013년 이 기계를 허가하였고, 2014년부터 미국, 호주, 캐나다 등의 병원에 2014년부터 판매되기 시작했다. 이 자동 마취 기계의 가장 파격적인 부분은 수면 내시경의 의료비를 1/10로 낮췄다는 것에 있다. 기존의 마취과 전문의를 통해서 내시경을 받으면 2,000달러에 달하는 비용을 세데시스를 사용하면 150~200달러까지 낮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의료 비용이 GDP의 20%에 육박할 정도로 높기 때문에 의료 비용의 절감은 국가적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동 마취 로봇의 도입에 미국의 마취과 의사 협회에서 택한 옵션은 이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었다. 이 기계가 개발될 당시 협회에서는 대대적인 반대 캠페인을 벌이고, 정치권에 로비를 전개했다. 사람을 마취하는 것은 ‘예술의 영역‘이기 때문에, 기계가 절대로 따라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또한 “세데시스의 사용 중에 돌발 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환자의 안전을 책임질 수 없다”는 환자 안전의 문제 가능성도 제기했다 [1]. 결국 존슨앤드존슨은 당초 계획보다 더 좁은 범위에 대해서 FDA 인허가를 받았다. 건강한 환자의 위장내시경에 대해서만 허가받았으며, 이 기계를 사용할 때 마취과 의사 혹은 전문 간호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조건도 달았다.

그러나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은 2016년 존슨앤드존슨은 끝내 스스로 이 제품을 시장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의료계에서는 “결국 안전 문제 때문에 시장에서 철수했다”고 반응했지만, 존슨앤드존슨 측은 안전 문제가 아니라 “경영적 판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의료계의 반발로 소수의 병원밖에 채택되지 않아서 매출 발생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또한 일각에서는 의료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무리하게 사업을 진행했다가, 다른 사업 부문의 타격을 받을 우려 때문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FDA 승인을 받기 위해 진행했던 임상 연구의 결과를 보면 세데시스는 기존 방식에 대해 효과가 더 좋을 뿐만 아니라, 더 안전하기까지 했다.[ref] 약 500여 명을 대상으로 했던 초기 임상연구에 따르면 이 자동 마취 로봇을 활용하면 마취된 환자들이 더 빠르게 회복하며, 마취 시 저산소증 문제도 더 적게 겪는 것으로 나타났다. 심지어는 의료진의 만족도 역시 세데시스를 활용하는 경우 더 높았으며, 부작용의 발생도 더 적었다. [ref]

한편으로는 로봇의 기능에 대한 한계를 실제로 지적하는 논문도 없지 않았으나[ref], 의사들 사이에서도 세데시스의 혁신성에 대해서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며, 몇몇 병원에서는 이 기계를 도입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SUNY 다운스테이트 병원의 레베카 트월스키(Rebecca Twersky)는 ‘이 기계는 파괴적 혁신이다’라고도 평가했다. 하지만 이 기계를 도입한 병원에서는 도입 과정에서 마취과 의사들의 반대가 극심했으며, 워싱턴 포스트가 보도한 세데시스에 대한 기사에 화난 마취과 의사들의 항의가 빗발쳤다는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

우리는 이러한 사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물론 세데시스에 대한 (앞서 언급한 임상시험에서 밝혀지지 않은) 안전성 문제가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기계가 시장에서 퇴출시키는 것만이 마취과 의사들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을지에 대해서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이러한 기계를 활용해서 마취과 의사를 보조하고 능력을 증강(augment)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정말로 없었던 것일까. 

더 나아가, 앞으로 맞닥뜨릴 비슷한 변화들에 대해서도 이와 같은 대응 방식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만약 마취과 협회에서 제기한 안전성 문제들을 해결한 새로운 자동 마취 기계가 등장한다면 어떨까. 실제로 세데시스보다 더 개선된 기계의 개발을 위한 연구는 계속되고 있다. [1, 2, 3, 4] 앞으로도 언제까지고 의료계가 동일한 방식으로 대처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물론 존슨앤드존슨의 최초 시장 진입 전략에도 문제는 있었다 [ref]. 기계의 특성상 마취과 의사들의 반발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이에 충분히 대비하거나 합의를 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활용 대상, 활용 방식 측면에서 환자에게 발생할 수 있는 안전 문제를 대비하고, 거부감을 느낄 의사들과 공존할 방안을 마련했더라면 시장 철수라는 극단적인 사태까지 벌어지지는 않았을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향후 의료 인공지능 분야에 진출할 기업에 시사하는 바도 적지 않다.

아무튼, 의료계에서도 인공지능의 도입에 반발하고 거부하는 방식으로 계속 대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대응이 장기적으로 성공적일 수 없다는 것을 러다이트 운동의 결과에서 알 수 있다. 러다이트 주의자들은 산업 혁명 시대에 공장 자동화를 막기 위해서 기계 파괴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그 결과가 어땠는지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luddite

 

쓰나미에 거슬러 헤엄칠 것인가

하지만 국내 의료계에도 의료 인공지능의 발전에 대해서 이런 러다이트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없지 않다. 지난 2017년 6월에 열린 대한영상의학회 춘계학술대회에서는 흥미로운 조사가 있었다. 영상의학과는 의료 인공지능의 영향을 가장 먼저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진료과 중의 하나인 만큼, 관심과 반향도 뜨겁다. 특히, 영상의학과와 관련한 국내 가장 큰 학회에서 의료 인공지능을 학회의 정식 세션으로 구성하여 세미나와 토론을 진행한 것도 그런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필자도 이 세션에 발표자와 토론자로 참여했다)

그런데 이 세션에서 흥미롭게도 참석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의료 인공지능의 도입과 관련한 실시간 투표를 진행했다.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익명으로 그 자리에서 투표하는 방식이었다. 조사 항목 중에는 “인공지능을 이용한 판독 결과가 오진일 때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가?” 혹은 “후배들에게 영상의학과 진학을 더 권유할 것인가?” 등의 중요한 이슈들도 있었다.

radiologist2
AI시대를 대비하여 영상의학과 의사에게 필요한 것은?
(2017년 대한영상의학회 춘계학술대회의 설문 조사 결과)

그중에 특히 필자에게 인상 깊었던 것은 “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하여 영상의학과 의사에게 필요한 것은?”이라는 이슈였다. 왜냐하면 조사 결과 인공지능 연구에 참여(23%)와 인공지능 교육(19%) 못지않게, 인공지능의 확산을 막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결과가 18%나 나왔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 결과를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또 한 번은 모 진료과 학회의 역대 회장직을 역임하신 고령의 의사들로 구성된 모임에서 필자가 의료 인공지능을 강의할 기회가 있었다. 참석자 중에는 최근의 기술 발전을 언급하시면서, 이런 기술이 의료계에 도입되는 것을 ‘막을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고 꽤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분도 계셨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기술의 발전이라는 도도한 흐름은 결코 거스르지 못하며, 이는 쓰나미를 막기 위해 열심히 둑을 쌓는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의료 인공지능의 발전과 도입을 근본적으로 막거나 금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만, 비로소 더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처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

의료의 역사를 돌이켜보더라도 첨단 기술의 발전은 항상 의료에 접목되어왔고, 그에 따라 의료는 계속 발전하고 의사의 역할도 진화해왔다. 100년 전에는 엑스레이가 없었고, 50년 전에는 CT도, 40년 전에는 MRI도, 30년 전에는 PACS(의료영상 저장전송시스템)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기술은 이제 의료 현장에서 너무도 일상화되어 있다. 의학이 첨단 기술을 받아들이면서 의료는 더 진보했으며, 그 과정에서 진료 프로세스도 바뀌고, 새로운 학과, 교육과정, 그리고 이를 전공한 전문의도 생겨났다. 단기적으로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에 저항, 반발,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그 결과는 명백하다. 인공지능도 결코 예외일 수는 없다.

 

인간 의사의 사라지는 역할

이를 전제로, 이제 의사의 역할 중 인공지능의 도입으로 사라질 역할, 유지될 역할, 새롭게 생겨날 역할에 대해서 논의해보도록 하자. 물론 필자라고 모든 진료과에 대해서 이 부분에 대한 답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각 진료과의 의사들이 현재의 역할을 이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해볼 수 있는 힌트는 몇 가지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먼저 사라질 역할이다. 이 사라질 역할을 논하기 위해서는 문제 정의부터 잘 해야 한다. 완전히 사라질, 즉 인간의 역할이 전혀 없이 완전히 자동화될 역할도 있을 것이다. 반면에 완전히 인간의 손을 떠나지는 않겠지만, 인공지능의 도입으로 의학적 판단을 내리는 과정의 효율성이 매우 높아짐에 따라서, 인간 의사의 역할이 축소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역할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결과적으로 이 과업의 수행에 필요한 인간 의사의 총수는 줄어들게 된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백 명의 영상의학과 의사가 판독할 수 있는 분량의 CT, MRI 이미지를 한 명의 의사가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최소한 같은 정확도로 판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의 발전이 계속될수록 효율성, 효과성, 안전성이 높아지므로 한 명의 의사가 감당할 수 있는 업무의 양은 더 증가할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해당 역할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의료계에서 체감하는 것은 사실 이와 크게 다르지 않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제프리 힌튼 교수의 ‘영상의학과 전문의를 양성하는 것을 당장 그만둬야 한다’는 발언도 이러한 측면에서 해석해볼 수 있다. 사실 그는 이어서 ‘세상에는 이미 너무 많은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있다’라고도 이야기했다. 미래에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한 명의 영상의학과 전문의가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 단위 시간당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이 많이 증가한다고 가정한다면, 결국 판독에 필요한 영상의학과 의사의 총 숫자는 줄어들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ai korea

 

도식화, 표준화할 수 있는 역할

인공지능에 의해서 사라지거나 축소될 의사의 역할은 단순하다. 기계가 더 쉽고, 정확하고, 빠르며, 일관적으로 할 수 있는 역할을 찾으면 된다. 예를 들어서, 암묵지나 단순한 느낌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명확한 근거와 논리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일, 혹은 복잡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순서도나 의사결정 트리(decision tree)로 도식화할 수 있는 역할, 정량적인 기준에 따라서 표준화할 수 있는 역할 등이 그러하다.

특정한 역할이 이러한 범주에 해당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아래의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다. 만약에 이 질문에 ‘예’라는 답이 나온다면 그 역할은 인공지능의 영향을 이미 받고 있거나, 혹은 머지않은 미래에 받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 이 환자 혹은 데이터에 대해서,
    • 왜 그러한 의학적인 결정을 내렸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 서로 다른 병원의 의사들이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비슷한 결론을 내릴 것인가?
    • 오늘 말고 한 달 뒤에 진료하더라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비슷한 결론을 내릴 것인가?

사실상 오늘날 의료 현장에서 이뤄지는 많은 의학적 의사결정이 위와 같은 범주에 해당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많은 경우에 의사들은 진료 가이드라인에 맞게 의료적 의사 결정을 한다. 의학적 근거에 따라서 체계적이고 표준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해놓은 것이 바로 진료 가이드라인이다. 많은 질병에 관해서 더 양질의 표준적인 진료를 제공하기 위해서 국제 학회 등에서는 진료 가이드라인을 내어놓는다. 충분한 연구와 근거가 축적되면 몇 년에 한 번 이 가이드라인의 세부적인 기준이 업데이트되기도 한다.

사실 이 가이드라인은 일종의 ‘순서도’라고 해도 무방하다. 유전형 등에 따른 질병의 세부적인 종류, 질병 진행 단계 등 환자의 상태, 각종 검사 결과 등에 근거하여 여러 단계의 의사 결정을 거치면서 환자의 진료와 치료법을 표준적으로 결정하는 순서도 혹은 의사결정 나무(decision tree)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nccn비세포성폐암의 진료에 대한 NCCN 가이드라인의 일부

대표적인 가이드라인 중의 하나가 암 환자의 진료에 대한 NCCN 가이드라인이다. 국제적으로 이렇게 암 환자 진료는 엄격하게 표준화되어 있다. 국가별로 조금씩 수정한 가이드라인을 별도로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전 세계적으로 대부분의 종양내과 전문의들은 기본적으로 NCCN 가이드라인에 맞게 진료한다.

사실 이렇게 가이드라인이 상세하고 엄격하게 표준화되어 있을수록 같은 의사 결정 과정에 근거하여 인공지능이 판단하기는 더 쉬워진다. 왜 IBM 왓슨이 가장 먼저 암 환자의 진료에 도전하기로 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이런 부분에서 추측해볼 수 있다.

 

시각적 인지 능력 기반의 역할

인공지능에 의해서 인간 의사의 역할이 축소될 것으로 보이는 또 다른 부분은 인간의 시각적 인지 능력에 기반을 둔 역할이다. 앞서 누누이 강조했다시피, 딥러닝 특히 CNN(Convolutional Neural Network)의 발전으로 이미 인공지능의 시각적 인지 능력은 인간을 뛰어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람의 얼굴을 인지하는 등의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사람보다 더 높은 정확도를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상 의료 데이터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앞서 우리는 영상의학과, 안과, 피부과, 병리과의 사례를 들어서, 이미지 형태로 나타나는 의료 데이터를 딥러닝이 이미 얼마나 정확하게 판독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본 바 있다. 진료과를 가리지 않고 이미지를 판독하는 문제는 지금도 이미 많은 경우에 전문의보다 딥러닝의 정확성, 효율성, 일관성이 높으며, 인공지능의 실력은 앞으로 더욱 향상될 것임은 자명하다.

특히 딥러닝을 통하면 인간이 소위 암묵지라고 부르는 영역도 학습할 수 있다고 본다. 인간 의사에게 판독 결과에 대해서 “이 데이터에 대해서 왜 그런 결정을 내렸나요?”라고 물어보면 “말로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딱 보니까 그런 것 같았다”는 종류의 것도 말이다. 딥러닝은 기존의 기계학습 방법과는 달리 주어진 데이터와 정답에 대해서 스스로 특징을 추출하여 학습한다. 그 특징은 때로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이는 결국 암묵지에 해당하는 지식도 학습할 수 있다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다만 그 암묵지를 통한 인간의 결과가 정확했을 때만, 딥러닝도 정확하게 학습 및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틀린 답을 주면, 딥러닝도 틀린 답을 학습하게 된다. (암묵지의 학습에 대해서는 추후 설명할 정신과 영역의 인공지능 사례들을 참고해보자)

이러한 측면 때문에, 많은 전문가가 지적하듯 필자도 영상의학과, 병리과 등 영상 의료 데이터를 판독하는 비중이 큰 진료과에서는 의사들의 역할 변화가 앞으로 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안과나 피부과, 치과 등 다른 진료과에서도 영상 의료 데이터를 판독하는 역할은 역시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는 비중이 커지리라고 본다.

이 진료과의 의사들은 이런 의견에 대해서 불편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학과들이 딥러닝에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학회에서도 관련 세션이 열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그러한 미래를 예견하고 준비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실리콘밸리의 유명 헬스케어 인공지능 스타트업 엔리틱(Enclitic)의 COO 케빈 리만(Kevin Lyman)은 2017년 한 인터뷰에서 세계 최대의 영상의학과 학회인 북미영상의학회(RSNA, Radiological Society of North America)에 참석했던 일화를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2014년 우리가 처음 RSNA에 참석했을 때에는 엔리틱이 유일한 딥러닝 스타트업이었다. 그때는 인공지능이 ‘의사를 대체한다’는 논란이 있기도 전이어서 그저 미친 녀석들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불과 2년 뒤 2016년 RSNA에서 다뤄진 핵심 주제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인공지능이었다.

radiolo

 

영상의학과는 인공지능에 영향을 받을까

다소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기는 하나, 이렇게 시각적 인지 능력 기반의 데이터 판독 비중이 큰 진료과가 인공지능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어떻게 받을지 조금 더 논해보고자 한다. 필자는 인턴 의사들이 전공을 선택하여 레지던트로 지원하는 시기가 되면, 진로 고민에 대한 조언 요청을 적지 않게 받는 편이다. 특히, 영상의학과와 같이 영상 의료 데이터의 판독 비중이 높은 학과의 전망에 대한 질문이 많다.

이러한 질문에 단순한 대답은 불가능하며, 전문가들 사이에서 의견도 갈린다. 다만 인공지능에 의해 적어도 영상 의료 데이터를 단순 판독하는 역할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의견에는 대부분 동감한다. 앞서 언급한 영상의학과, 병리과가 그러하고, 안과의 안저 사진 판독, 소아과의 엑스레이 골연령 판독, 소화기내과의 내시경 결과 판독 등이 그러하다.

다만, 이러한 변화가 언제 본격적으로 시작될지에 대해서는 예측하기에 따라서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현재 진료하고 있는 40, 50대의 전문의들은 은퇴 전에 이런 경향이 본격화되지는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보수적으로 보더라도 현재의 의과대학생이 전문의를 취득한 이후, 적어도 은퇴하기 이전에는 그 변화의 영향을 받게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 이슈에 관한 토론은 많은 경우 향후 20년을 기준으로 논의한다[ref]. 기술적으로 볼 때 20년은 영상 의료 데이터 판독에 대한 여러 문제를 인공지능이 해결하기에 짧지 않은 시간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메이요 클리닉의 브래들리 에릭슨 박사는 2017년 미국의 국립암센터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딥러닝 알고리즘으로 유방촬영술(mammography)이나 흉부 엑스레이 판독은 향후 3년, 혹은 그 이전에도 가능해질 수 있다. 이 목록은 10년 안에 두경부, 흉부, 복부, 골반 등의 CT 및 두경부, 무릎, 어깨 등의 MRI과 갑상선, 간, 경동맥 초음파로 확대될 것이다. 15년에서 20년 이후에는 대부분의 영상 의료 데이터를 포괄할 수 있을 것이다”고 언급했다.

2017년 연말을 기준으로 국내의 대표적인 인공지능 스타트업인 뷰노와 루닛도 엑스레이 골연령 판독 및 유방촬영술 등의 문제에 대해서 임상 시험을 수행하고 있다 [1, 2].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의료 인공지능 스타트업 지브라 메디컬 비전(Zebra Medical Vision)은 2017년 10월, 다양한 종류의 영상 의료 데이터를 단돈 1달러에 판독해주는 서비스 AI1을 구글 클라우드를 기반으로 전세계를 대상으로 출시한다고 밝혔다. 앞으로 이런 파격적인 서비스는 계속 등장할 것이며, FDA와 식약처의 관련 규제도 정비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국내에도 2020년이 되기 전에 의료기기로 인허가 받고 병원 시스템이나 진료에 정식으로 도입되는 인공지능이 나올 가능성은 매우 높다. (다만, 규제기관의 인허가를 받는 것, 병원에 도입되는 것, 그리고 진료에서 널리 활용되는 것은 각기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점도 알아두자)

어쩌면 적어도 수십 년 내에 영상의학과에서 판독하는 ‘모든’ 종류의 데이터를 인공지능이 해결 가능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촬영 장비의 종류, 촬영 대상 신체 부위, 각 질병의 종류를 모두 고려하면 아주 많은 조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촬영 기술과 장비가 나오면 분석해야 하는 데이터의 종류 자체가 늘어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아서 더욱 효율적으로 판독할 수 있는 (즉, 해당 문제에 대한 의사의 역할이 줄어드는) 범위 역시도 증가할 것이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전 속도는 더욱 빨라질 것이며, 해결되는 문제도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영향을 예측하기 위해서 중요한 변수는 역시 시간이다. 이 모든 변화가 몇 년 내에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보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이 변화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지만, 변화가 수십 년의 오랜 시간에 걸쳐서 서서히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한 인공지능이 나타나 스스로 알아서 데이터를 찾고 학습하지 않는 이상, 인공지능의 개발에는 적지 시간, 돈, 노력, 데이터가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미국의 국립암센터의 토론회에서 메릴랜드 대학의 엘리엇 시겔(Eliot Siegel) 박사도 (그는 지브라 메디컬 비전의 자문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시각의 견해를 내어놓았다.

영상의학과 전문의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수천 가지 영상의학과 문제에 대해서 모두 개별적인 인공지능이 개발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 수천 가지 모든 문제에 대한 개별적인 학습 데이터와 판독 결과, 그리고 개발비가 필요하다. 이런 인공지능이 모두 개발되는데 100년이면 될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면 20년 안에 일어날 수는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엘리엇 시겔 박사의 예측도 영상의학과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시간을 기준으로 말했다는 점도 유의해보자. 우리가 고민해봐야 할 것은 설사 20년 혹은 가까운 미래에 인공지능이 그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어떤 종류의 문제를 얼마나, 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인공지능은 이러한 과정에서 문제들을 한 번에 하나씩 각개격파(divide and conquer)하는 방식으로 해결해나갈 것이다. 주지할 점은 이러한 과정이 비가역적이라는 점이다. 즉, 하나의 문제를 만족할만한 수준으로 해결했다면 (예를 들어, 인간 전문의의 수준에 도달했다면) 그 문제는 더 들여다볼 필요 없이 그다음 문제의 해결에 온전히 집중하게 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판독에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고, 문제의 난이도나 위해도가 적으며, 의사들이 하기 싫어하거나, 의료 행위에 대한 보험 수가가 낮고, 자동화할 경우 병원에 돌아가는 효과가 큰 종류의 문제부터 인공지능이 개발되고 적극적으로 도입될 가능성이 높다. 대량의 영상 의료 데이터를 집중적으로 판독해야 하는 건강검진센터나 전문 병원은 이런 영향이 더욱 클 것이다. 더욱 과감하게는 개원가 각 분야 의사들이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스스로 판독하는 비중이 늘어나면, 영상의학과 전문의에게 주어지는 데이터의 수가 적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도 있다.

특히 의사와 병원이 필요하고 환영하는 인공지능의 경우 진료 현장에 도입이 빠를 수 있다. 예를 들어, 소화기내과의 캡슐 내시경이 그러하다. 기존의 위내시경과 대장내시경으로 식도, 위, 십이지장, 대장의 검사는 가능하다. 하지만 십이지장과 대장의 사이에 있는 깊숙이 있는 꼬불꼬불한 소장의 경우 호스를 집어넣는 기존의 내시경 검사법으로는 관찰이 어렵다. 그래서 소장에 이상이 의심되는 경우는 캡슐 내시경을 사용한다. 작은 알약 크기의 소형 캡슐에 카메라, 플래시, 전송장치가 들어 있어서 환자가 이를 삼키면 소화관을 통과하면서 1초에 2~3장의 사진을 찍어서 전송한다. 검사는 8~12시간 동안 진행되며 환자는 그동안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

Capsule-endoscopy
알약 크기의 캡슐 내시경 장치를 삼키면 위장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출처)

ENDOCAPSULE_Screen_Overview_001_V1_20080804_700x480-
캡슐내시경으로 촬영된 사진들 (출처: 올림푸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찍히는 사진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현재 이 캡슐 내시경 결과를 판독하기 위해서 의사가 환자당 서너 시간 동안 꼼짝없이 앉아서 이 사진들을 들여다봐야 한다. 사진이 워낙 많다 보니 잠깐 집중력을 잃었다가 실수를 할 수 있다. 만약 이렇게 의사들이 꺼리는 판독 과정에 대한 부담을 줄여준다면, 의사도, 병원도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의료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기업의 입장에서는 어떤 인공지능을 의료계에서 원하는지에 대한 니즈를 잘 파악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영상의학과 레지던트를 권장하는가

자, 그러면 다시 젊은 의사들의 진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앞서 언급한 2017년 영상의학과 춘계학술대회에서 필자는 영상의학과 레지던트를 ‘덜 권장한다’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패널 토론 및 실시간 설문조사 질문 중의 하나로 나온 것이 바로 “인공지능으로 인해 나는 과거와 비교하여 영상의학과 레지던트를 하는 것을 덜 권장하는가?” 였기 때문이다. 토론자들과 청중은 모두 ‘더 권장한다’, ‘변함없다’, ‘덜 권장한다’의 세 가지 의견 중의 하나를 골라야 했다. 토론 후에 청중들이 고른 반응은 ‘덜 권장한다’가 24%, ‘변함없다’는 56%, 그리고 ‘더 권장한다’가 20%였다. (참고로 필자 외의 다른 두 토론자는 각각 ‘동일하다’와 ‘더 권장한다’에 한 표씩을 던졌다)

19420393_1691430137563610_1126383950014378947_n

AI로 인해 영상의학과 레지던트를 더 권유할 것인가?
(2017년 대한영상의학회 춘계학술대회의 설문 조사 결과)

필자는 현재의 인턴, 의과대학생들이 향후 영상의학과를 진학하는 것을 권장하지 않는다거나, 향후 입지가 좁아질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말장난 같지만 ‘권장하지 않는다’와 ‘덜 권장한다’의 차이를 생각해보자) 다만 앞서 언급한 여러 변화를 인지하지 못하고, 향후 역할 변화에 대한 충분한 고민 없이 현재의 패러다임 하의 이유만으로 지원하는 것은 권하고 싶지 않다.

엘리엇 시겔(Eliot Siegel) 박사는 토론회에서 1970년대 엑셀과 같은 스프레드시트 프로그램 때문에 회계사들은 직업을 잃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그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엑셀이 출시된 이후에 회계사의 일하는 방식과 우수한 회계사가 되기 위해서 요구되는 역량은 상당히 달라졌다.

이처럼 영상의학과, 병리과 등 시각적 인지 능력이 중요한 진료과의 전문의에게 요구되는 역량도 앞으로 상당히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문제는 현재의 의학교육과 수련 과정은 이러한 역량을 계발하기 위해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시점으로부터 불과 며칠 전인) 2017년 10월 대한영상의학회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 많은 교수님도 동의한 바 있다. 인공지능은 현재도 계속 발전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기술이기 때문에, 현재 많은 시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향후 몇 년 내에 의료계에서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의사의 새로운 역량에 필요한 교육과정을 완성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즉, 최근에 전문의를 취득했거나, 향후 적어도 몇 년 내로 전문의를 취득하는 의사들은 기존의 패러다임 하에서 기존의 방식으로 훈련받은 채로 미래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단편적으로는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진료하는 프로세스도 배우지 못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는 그렇게 효율적으로 판독을 하게 되면서 생기는 남아도는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도 문제가 될 것이다. 현재 대부분의 영상의학과 전문의들은 온종일 수십, 수백 장의 영상을 판독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 판독에 걸리는 시간을 줄여서 여분의 시간과 노력이 남았을 때, 이를 활용하는 새로운 역할과 가치를 찾지 못한다면 결국 필요한 의사의 수가 감소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는 비단 특정 진료과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지만 말이다.

패널 토론과 설문조사에서 영상의학을 전공하는 것에 대해서 ‘변함없다’고 하신 분들은 앞서 언급했듯이 변화 자체는 부인하지 않지만, 그 속도가 그리 빠르지 않다고 판단하셨을 것 같다. 그리고 ‘더 권장한다’고 답한 분들은 인공지능의 도입에 따른 새로운 역할의 발견과 이 역할이 창출할 추가적인 가치에 대해 낙관적으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견해도 일리가 있다.

하지만 젊은 의사들의 입장에서는 이 새로운 역할과 전문 역량을 어떻게 계발할지에 대해서 적어도 당분간은 의과대학과 병원에서 가르쳐주지 못하리라는 것도 고려해봐야 한다. 보수적인 의과대학의 커리큘럼과 병원의 수련 과정이 바뀌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커리큘럼과 수련 과정을 바꿀 수 있는 의사결정권을 가진 분들이 이런 변화를 만들기 위한 충분한 동인을 가졌는지도 고려사항이다.

그러므로 최근에 배출된, 혹은 향후 몇년간 배출될 의사들은 이 새로운 역할의 모색과 역량의 계발에 대해서 ‘스스로’ 각자 도생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본다. 실제로 현재 서울의 모 대학병원 영상의학과에서는 전공의(레지던트)들끼리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서 딥러닝을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더 나아가 여러 진료과에서는 전공의가 아니라 기존의 의사들을 어떻게 재교육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향후 고민하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역할과 교육에 대해서는 이후 ‘새로운 역할’ 파트에서 더 논의하기로 한다.)

필자가 토론회에서 영상의학과 레지던트를 하는 것에 대해서 의견을 요청받았을 때 상대적으로 ‘덜 권장한다’고 답한 것은 이러한 의미였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변화의 속도 및 변화가 만들어낼 새로운 역할의 가치를 어떻게 판단하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만약 필자의 조카가 현재 의과대학생이고, 영상의학과나 병리과 등 시각적 인지 능력 기반의 판독 비중이 높은 학과로 전공을 정할지 고민 중이라면, 무조건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이슈와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충분히 고민해보았는지를 되물을 것 같다.

(계속)

 

이 글을 쓰는 데는 많은 분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서울아산병원 영상의학과 서준범 교수님, 강남세브란스 영상의학과 김성준 교수님, 서울의대 해부학교실 최형진 교수님, 경희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신수용 교수님, 서울아산병원 감혜진 박사님, VUNO 정규환 이사님, 강동경희대병원 소화기내과 유정선 선생님, 경북대병원 마취과 서이준 선생님 등 많은 분들께서 글을 먼저 읽으시고 고견을 주셨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About The Author

디지털 헬스케어를 통해 의료를 혁신하고 세상을 더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벤처투자자, 미래의료학자, 에반젤리스트입니다. 포항공대에서 컴퓨터공학과 생명과학을 복수 전공하였고, 동대학원에서 전산생물학으로 이학박사를 취득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 서울대학교병원 등에서 연구하였습니다. 현재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 디지털 헬스케어 파트너스 (DHP)를 2016년에 공동창업하였고,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여 개의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에 투자하였습니다. 네이처의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자매지 『npj 디지털 메디슨』의 편집위원이자, 식약처, 심평원의 전문가 협의체 자문위원입니다. 『디지털 헬스케어: 의료의 미래』 『의료 인공지능』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등을 집필하였습니다.

Leave A Respon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