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두 번의 칼럼에서 [1, 2], 이번 정부가 천명하고 있는 ‘인공지능 3대 강국’이라는 야심찬 목표를 의료 인공지능에서 시작하자고 제안하며, 특히 의료 분야에서는 한국이 ‘3대 강국’이 아닌 ‘1대 강국’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의료 인공지능은 소버린 AI 측면에서도 국가의 전략적 자산으로서의 가치도 크다. 이를 위해서는 전례 없이 파격적인 정책적 지원이 필요함을 강조하였는데,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인 정책 제안을 하려고 한다. 바로 병원에게 인공지능 바우처를 제공하는 것이다.
하정우 AI미래기획수석은 민간에서 근무하던 시절 전 국민에게 ‘무료 AI 바우처’를 제공하자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언급한 바 있다. 이를 의료 분야에 응용하여, 병원에게 의료 인공지능을 도입할 수 있는 바우처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는 의료 인공지능 분야의 막힌 혈을 뚫어 기술적, 산업적, 의학적 혁신을 촉진하고, 결과적으로 한국이 글로벌 의료 인공지능 기술의 패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현재 한국은 의료 인공지능 분야에서 전 세계에서 손꼽힐 정도의 전방위적인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 원천 기술력, 기술을 사업화하고, 인허가 하며, 의료 현장에 적용하는 일이 글로벌 최고 수준으로 빠르고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좋은 기술을 가진 기업도 돈을 벌 수 있는 구조가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은 국민건강보험이라는 하나의 국영 건강 보험만 운영되기 때문에, AI 같은 기술의 도입에 극히 보수적이다. 병원의 입장에서는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기술은 도입하기를 꺼려한다.
만약 병원에게 인공지능을 도입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다면, 기업은 자연스럽게 매출을 발생시킬 수 있고, 이 기업들은 국내 성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병원과 환자들도 이득을 볼 수 있다. 특히 의료 인공지능에서 기술, 산업, 규제, 병원 도입, 데이터, 근거 창출 등은 모두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기 때문에, 병원 도입의 촉진은 이 전체 선순환구조로 이어질 수 있다.
필자가 최근에 느끼는 한국 의료 인공지능 생태계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일선 병원들이 의료 인공지능을 더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쪽으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몇몇 선도적인 병원을 제외하면 의료계에서 AI 기술에 대한 이해도 낮았고, 도입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나, 인프라 미비, 성공 사례 부족 등으로 도입을 주저했다. 특히, 도입을 했을 때 병원 입장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도 불확실한 경우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기술의 발전, 의료계의 이해도 증가, 선도적인 도입 사례들이 서서히 축적되면서, 병원들의 인공지능 도입에 관심도 증가하고 있다. 비록 이런 관심이 아직은 소위 ‘얼리어답터’ 병원들을 위주로 국한되어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만약 병원에 바우처를 제공하여 일선 병원이 인공지능을 도입할 수 있는 문턱을 낮춰줄 수 있다면, 의료 인공지능이 캐즘을 넘어 주류 병원 시장으로 확대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바우처로 아무 인공지능이나 도입할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정책의 큰 리스크는 결국 재정의 낭비와 비효율일 것이다. 따라서 최소한의 기준이 필요하다. 필자는 그 기준을 ‘식약처에서 인허가 받은 인공지능’ 정도로 제한하면 어떨까 한다. 식약처에서 인허가 받은 AI는 최소한의 성능과 안전성을 검증 받았으므로, 이를 대상으로 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현재 한국 식약처에서는 인허가 받은 인공지능이 300개가 넘어가므로, 병원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충분할 것이다.
그 중에서 무엇을 도입할지는 시장에, 즉 각 병원의 결정에 맡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개별 병원에서 여러 인공지능 의료기기에 대한 기술 수준, 정확성, 임상 결과, 근거 수준 등을 기반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어떤 병원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흉부 엑스레이나 유방촬영술과 같은 의료 영상 분석일 수도 있고, 판독문을 자동으로 써주는 인공지능일 수도 있다. 또 다른 병원에게는 심정지나 패혈증과 같은 심각한 질환을 미리 예측하는 인공지능일 수도 있다. 혹은 진료실에서 의사와 환자의 대화를 자동으로 전자의무기록에 입력해주는 인공지능일 수 있다. (보통 보이스 EMR은 의료기기에 해당되지 않지만, 병원 입장에서는 중요한 인공지능이므로 예외적으로 바우처의 활용처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현 정부는 인공지능을 육성하기 위해서 파격적인 정책을 약속하고 있다. 이런 재정적인 지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분야로는 의료 인공지능만한 분야가 없다. 파격적인 정책 지원의 사례로 들었던, 독일의 DiGA를 다시 살펴보자. 독일은 2019년 디지털헬스케어특별법을 제정하며, 디지털 치료제가 허가를 받으면, 최소한의 요구사항만 갖추어도 수가를 지급하는 파격적인 제도를 도입했다. 이 제도 덕분에 디지털 전환의 후진국이었던 독일이 디지털 치료제 분야에서만큼은 전세계 회사들이 앞다투어 찾는 국가로 발돋움했다.
이 DiGA를 위해 지난 5여년 동안의 지출은 2억 3,400만 유로, 한화로 3,800억원 정도다. 정부가 수천억원 정도의 재정을 써서, 기업가치가 조단위를 넘는 기업을 몇개만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을 장악해나갈 수 있다면, 이는 현재 정부의 정책이 지향하는 바일 것이다. 이 금액이 크다고 생각한다면, 최근 메타가 인공지능 분야 인재 한 명을 영입하기 위해서 천억원 이상의 연봉을 지불하고 있다는 것을 떠올려 보자.
최근 국가대표 인공지능을 선발하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 범용 거대 언어 모델(LLM)의 개발을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소버린AI는 단순히 자국의 독자적인 LLM을 보유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자국민에게 중요한 데이터를 보호하고, 이를 기반으로 인공지능 기술과 플랫폼, 서비스를 갖추며, 이를 일선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용하고, 더 나아가서는 이를 통해 기술 패권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미래의 인공지능 시장은 결코 범용 LLM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여러 버티컬에서 특화된 파운데이션 모델로 세분화되어 경쟁은 치열해질 것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분야 중의 하나가 의료일 것이며, 한국은 그 경쟁의 선두에 있다. 병원에 인공지능 바우처를 제공한다면, 병원 도입-데이터-근거 창출-기술-산업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결국 한국의 의료 분야의 소버린AI를 확보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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