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28th March 2024,
최윤섭의 디지털 헬스케어

인공지능의 시대, 의사의 새로운 역할은

 

인공지능이 임상적으로 유용할까

이제 의료 인공지능의 도입에 따른 의사의 역할 변화 중, 이제는 새롭게 생겨날 역할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자. 새로운 역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인공지능을 진료에 활용하는 것이다. 앞으로 의사들은 인공지능을 어떻게 활용하여 환자를 진료하고, 임상적인 결정을 내릴지를 연구하고, 또 배워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을 어떻게 진료에 이용할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공지능이 임상적으로 얼마나 유용한지를 증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직 대부분의 의료 인공지능은 한창 개발 중인 기술로, FDA나 식약처의 인허가를 받거나 병원에 도입된 기술은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선도적으로 개발된 몇몇 기술들의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므로, 사업화 및 병원 도입이 추진되는 인공지능은 점차 증가할 것이다. 또한, 이런 선도 기업이 의료기기 인허가 과정을 거치면서 규제 조건을 정립해놓으면 후발 주자들의 진출은 더욱 쉬워질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IBM 왓슨 포 온콜로지와 같이 (한국과 미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에서) 의료기기로 분류되지 않는 의료 인공지능은 이미 국내외 병원에 도입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공지능을 진료 현장에서 의사가 어떻게 활용할지, 또한 활용할 경우 어떠한 효용을 얼마나 얻을 수 있을지는 아직 거의 정립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의료 인공지능을 진료에 이용함으로써 환자 생존율 증가 및 재발률 감소 등 치료 효과의 개선, 진료 정확도의 향상, 오진의 감소 등의 임상적 효용을 기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진료 효율성의 증대, 의료 비용의 절감, 병원 매출 증대, 의료 수가 확보, 환자의 만족도, 의료진의 만족도 등의 비교적 임상 외적인 효용도 기대하고 있다.

여기서 필자가 ‘기대하고 있다’고 표현한 것은 아직 의료 인공지능이 이러한 효용을 줄 것인지에 대해서는 증명된 바 없고 근거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의 의료 인공지능 개발 및 증명은 기본적인 정확성과 안전성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정확성과 안전성이 높다고 증명된 인공지능이라고 할지라도, 임상적인 효용(clinical utility)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앞서 설명하였던 딥러닝 기반의 유방 촬영술(mammography), 병리 데이터를 판독하는 인공지능, 혹은 IBM 왓슨 포 온콜로지의 정확성과 위해도가 입증되었다고 가정할지라도, 이를 실제 진료 현장에서 활용했을 경우 진료 정확도 향상, 치료 효과 개선, 진료 효율성 증대, 의료 비용 절감 등의 효용이 발생할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같은 의료 인공지능이라고 할지라도 누가 어떻게 활용할지에 따라서도 이런 의학적 효용은 달라지며, 의사나 환자, 병원에 미치는 영향도 달라질 수 있다. 앞서 IBM 왓슨 포 온콜로지에 대해 설명할 때에도, 이러한 원칙과 기준에 대한 증명이 부족함을 지적한 바 있다. 국내외 여러 병원이 왓슨 포 온콜로지를 도입하였으나, 이를 진료 현장에서 활용하는 것은 여전히 개별 병원의 자체적인 기준을 따르며, 그러한 기준이 임상적 효용을 극대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근거는 아직 없다. 이는 IBM 왓슨뿐만 아니라 다른 의료 인공지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더 구체적으로는, 예를 들어 어떤 환자의 경우에 인공지능의 의견을 구할 것인가. 모든 환자? 특정 조건의 환자? 환자가 요구하는 경우? 또한, 인공지능의 결론을 의사와 환자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특히 인공지능의 결정과 의료진의 결정이 충돌하는 경우에 최종 결론은 어떻게 내릴 것인가. 인공지능의 결론을 환자에게도 공개하는 것이 좋은가. 그리고 인공지능의 의견을 듣는 것이 의료 비용의 측면에서 얼마나 가치가 있으며, 더 나아가 그 가치가 건강 보험료를 지불해야 할 만큼 큰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의사들의 새로운 역할은 임상 연구를 통해서 인공지능의 활용 방식과 임상적 효용에 대한 답을 얻는 것, 그리고 이러한 결과에 따라서 인공지능을 진료 현장에서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하지만 임상적 효용을 증명하는 것도, 기존의 진료 프로세스에 인공지능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임상적 효용의 증명이 어려운 이유

과거의 연구 결과들을 보면 의료 인공지능의 임상적 효용을 증명하는 것이 왜 쉽지 않은 일인지 알 수 있다. 임상적 효용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임상 연구가 필요하며, 이는 오랜 시간과 비용, 인력이 필요한 일이다. 더구나, 이런 연구를 거치더라도 의학적 효용에 대해서 결론을 쉽게 내리지 못하거나,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결론이 나올 수도 있다. 이는 과거 엑스레이 유방 촬영술(mammography)의 자동진단보조 (Computer-aided detection, CAD) 시스템의 임상적 효용을 증명하는 과정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앞서 딥러닝을 이용한 영상 의료 데이터의 분석 부분에서 소개했듯이, 유방 촬영술은 엑스레이 촬영을 통해서 유방암 의심 병변을 발견하기 위한 검사이다. 유방 촬영술 자동진단보조(CAD) 시스템은 이미지 분석을 통해서 유방암 의심 병변을 찾아줌으로써 의사의 판독을 보조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설명하는 유방 촬영술 CAD은 과거의 (딥러닝 이전의) 기계학습 방법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시스템으로, 현재 루닛 등에서 딥러닝을 기반으로 개발 중인 유방 촬영술 인공지능의 이전 세대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런 유방촬영술 CAD는 일찍이 1998년 미국 FDA 승인을 받고, 2002년부터 미국에서는 의료보험 혜택을 받기 시작했다. 보험 혜택 이후로 미국에서 유방 촬영술 CAD의 사용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보험 혜택 전의 사용 비중은 5%도 안 될 만큼 미미했으나, 2008년에는 74%, 2012년에는 83%까지 크게 증가한 것이다[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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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보험 적용 이후로 유방 촬영술 CAD의 사용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출처: JAMA Intern Med)

그런데 이런 유방 촬영술 CAD는 어떻게 임상적 효용을 증명했으며, 그 결과는 최종적으로 어떠했을까? 가장 먼저 증명했던 것은 유방 촬영술 이미지를 한 명의 의사가 단독으로 판독하는 것보다, 두 명의 의사가 중복으로 판독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었다. 여러 연구를 통해서 중복 판독이 단일 판독보다 암의 검출률(detection rate)이 4-14% 정도 더 높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 2, 3, 4, 5, 6]. 상식적으로 한 명이 판독하는 것보다 두 명이 판독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의학에서는 이런 단순한 가설도 임상 연구를 통한 근거를 기반으로 증명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다음으로 증명한 것은 두 사람이 중복으로 판독하는 것과, 한 명의 사람이 CAD를 참고하여 판독하는 것의 정확도가 비슷한지를 증명했다. 이를 증명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는데, 임상적 효용이 유의미하지 않다거나, 결과가 다소 엇갈리게 나온 연구들을 거쳐서 [1, 2], 마침내 2008년 대규모 임상 연구의 결과가 저명한 의학저널 NEJM에 논문으로 발표되었다. 영국에서 복수의 병원에서 3만 명 이상의 환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대규모 임상시험을 진행한 결과, 한 명의 사람이 CAD를 참고하여 판독하는 것이 두 명의 사람이 중복으로 판독하는 것을 대체할 수 있으며, 암의 검출율도 개선할 수 있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이러한 전체 과정을 되짚어보면, 단독 판독보다 중복 판독이 더 정확하며, 이어서 중복 판독의 정확도가 CAD를 이용한 단독 판독과 비슷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10년 이상의 기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 보였던 유방 촬영술 CAD의 임상적 효용에 대해서는 또 다른 반전이 있었다. 2015년 JAMA에는 2003~2009년에 시행된 유방 촬영술 CAD 30만 건 이상을 후향적으로 분석한 연구가 발표되었다. 이 연구에서는 유방 촬영술 CAD가 암의 검출이나 판독 정확도 및 민감도 측면에서 개선 효과가 유의미하지 않거나, 오히려 악영향을 준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Screen Shot 2017-11-01 at 10.28.09 AMCAD의 사용이 민감도, 검출률 등에서 유의미하지 않거나,
오히려 악영향을 미친다. (출처: JAMA Intern Med)

물론 이 2002년에 승인받은 이 CAD는 아주 오래된 기술이다. 현재 루닛 등에서 개발하고 있는 딥러닝 기반의 유방 촬영술 인공지능의 정확도는 극적으로 높을 것이 자명하다. 이렇게 정확도 자체의 큰 개선이 있게 되면, 의학적 효용을 다시 평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과거의 CAD의 사례에서 인공지능의 개발 및 기술적인 정확도와는 별개로 진료 현장에서 사용되는 인공지능의 임상적 효용의 증명에는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으며, 그 결과는 우리의 예상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인공지능과 함께 진료하기

임상적 유효성이 증명되면, 의사는 진료 현장에서 인공지능을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진료하는 법에 대한 원칙이나 가이드라인이 필요하고, 의사는 이를 새롭게 배워야 할 수도 있다. 또한, 기존의 진료 및 판독 프로세스에 자연스럽게 인공지능을 녹여내는 것도 관건이다.

사람의 습관이나 기존의 업무 방식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그러한 행동이 환자의 건강을 담보로 하는 것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또한 많은 경우, 진료 현장에서 의료진은 과중한 업무와 시간 부족에 허덕인다. 이런 상황에서 인공지능을 진료 현장에 도입하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과 세심한 배려가 필요하다.

이는 의료진뿐만 아니라 인공지능을 개발하는 개발자와 디자이너가 함께 고민하면서 풀어가야 할 문제다. 인공지능의 기술적 수준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사용법, 인터페이스, 사용자 경험 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용 방법이나 UI/UX에 따라서 기존의 진료 프로세스의 어느 부분에 어떻게 녹여낼 것인지가 달라지고, 의료진의 수용 정도와 활용도가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기존의 영상의학과 전문의들이 의료 영상을, 병리과 전문의들이 병리 데이터를 현미경으로 하루에도 수백 건씩 분석하는 프로세스를 생각해보자. 만약 인공지능이 기존의 판독, 진료 프로세스를 방해하거나, 지나치게 큰 변화를 요구하거나, 사용하기가 귀찮고 번거롭거나, 추가적인 행위를 요구하고, 더구나 그 추가적인 행위가 수가를 받을 수 없는 것이라면 인공지능이 진료 현장에 도입되고, 기존의 진료 프로세스에 녹여내기가 매우 어려울 것이다. 이는 의사와 인공지능 개발자 한 쪽이 혼자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며, 개발 초기부터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임상적인 유효성도 증명했고, 인공지능의 인터페이스가 세심하게 잘 디자인되어, 기존의 진료와 판독 프로세스에 적절하게 녹여낼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제 문제는 의사를 교육하는 것이다. 다른 새로운 기술이나 진단법, 치료법, 수술법이 새롭게 개발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을 임상에 활용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의사를 교육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는 의과대학에 재학 중인 의대생이나, 레지던트를 교육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수 강좌 등을 통해서 일선 현장에서 이미 진료하고 있는 의사들의 재교육까지도 포함한다. 기술의 발전과 혁신은 소수의 인재에 의해서 구현될 수 있지만, 새로운 기술을 진료 현장에 도입하는 일은 모든 의사를 교육하는 과정을 수반되기에 더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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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이 진료 현장에 도입되는 과정은 여러 단계에 걸쳐서 이루어질 것이다. 경영학의 기술수용주기 모델에 따르면 새로운 기술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배우고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해서는 혁신 수용자 (innovators) – 선각 수용자 (early adopters) – 전기 다수 수용자 (early majority) – 후기 다수 수용자 (late majority) – 지각 수용자 (laggards)의 단계로 나뉜다. 의료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로 의사 중에서도 인공지능 개발자들과 적극적으로 함께 개발까지도 참여하는 ‘혁신 수용자’와 이를 가장 먼저 받아들이는 ‘선각 수용자’, 이후 기술이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생각했을 때 받아들이는 ‘전기 다수 수용자’, 사용을 주저하며 먼저 받아들인 의사들이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지켜본 이후에야 받아들이는 ‘후기 다수 수용자’, 그리고 끝까지 기존의 방식을 고수하는 ‘지각 수용자’ 등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다만 의료라는 분야의 특성상 다른 일반 시장보다, 전기 다수 수용자보다 후기 다수 수용자나 지각 수용자의 비중이 더 높을 수도 있다.

필자가 항상 강조하듯이 이러한 흐름을 거스를 수 없다. 인공지능의 정확성, 안전성, 임상적 효용이 충분하게 증명되었다면, 의료계의 입장에서는 이를 임상에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의사와 환자, 병원 모두 그 효용의 혜택을 받는 것이 더욱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의사들은 기본적으로 과학자이며, 과학자들은 데이터와 근거가 있는 것들을 받아들인다. 인공지능의 정확성, 안전성, 임상적 효용, 그리고 임상 외적인 효용에 대한 근거가 지속해서 도출된다면 (특히 여기에는 비용 대비 효과성의 증명과, 이를 통한 보험 수가의 지급도 포함된다), 진료 현장에서의 수용 속도와 주류 시장으로의 확대도 용이해질 것이다.

 

의사도 인공지능을 배워야 할까

필자가 의과대학에서나, 의사를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많이 받는 질문이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의사도 인공지능이나 프로그래밍을 배워야 하냐는 것이다. 즉, 이미 만들어진 의료 인공지능의 활용하는 방법 정도가 아니라, 딥러닝 기술이나 프로그래밍을 배워서 인공지능을 개발할 수 있는 역량까지 갖춰야 하냐는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모든 의사가 인공지능 기술을 배우고, 인공지능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또 현실적으로 의사가 인공지능 전공자만큼의 전문성을 갖추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의사라면 인공지능을 좀 더 깊게 배워서 나쁠 것은 없다고 본다. 여기에서 보통 필자는 자동차의 비유를 든다.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서, 자동차의 세부적인 부품의 메커니즘이나 자동차를 조립하는 법을 일일이 배울 필요는 없다. 하지만 일류 카레이서라면 자동차의 작동 원리와 기초적인 정비 방법을 알고 있으면, 더 우수한 선수가 되기 위해 도움이 될 수 있다. 사실 이러한 원리는 이미 기존의 의학에서도 통용되고 있다. 새로운 의료 장비, 혁신적인 신약, 새로운 진단 방법을 활용하기 위해서, 모든 의사가 기계적 작동 원리나 분자 수준의 메커니즘까지 이해하지는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사실 약 중에는 작용 기전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은 것도 많다)

의사에게 인공지능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앞서 강조한대로 활용하는 방법은 당연히 배워야 한다. 하지만 모든 의사가 인공지능의 메커니즘이나 개발 방법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거나, 더 나은 의료 인공지능의 개발에 기여하고 싶다면, 좀 더 깊이 배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과대학에서도 코딩이나 기초 인공지능 수업이 필수 과목일 필요는 없지만, 선택 과목 정도로 갖춰지는 것은 좋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연세의대, 성균관대 의대 등 국내에서도 일부 의과대학은 프로그래밍 관련 과목을 개설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학습의 목표는 최소한 인공지능 전문가나 개발자와 말이 통하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의사가 스스로 인공지능 전문가가 되거나, 직접 코딩을 하지는 않더라도, 전문가와 의사소통하고 협업할 수 있을 정도의 배경 지식을 갖추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크게 넓어진다. 또한, 본인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어찌보면 이러한 협업이 필요한 경우, 단순한 지식보다 다른 분야의 공부를 통해서 갖추게 되는 열려 있는 자세가 더 중요한 부분일 수 있다.

 

새로운 세대의 의사 양성하기

이렇게 인공지능 시대의 경쟁력을 가진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나 의과대학의 교육 혁신이다. 특히, 현재의 의과대학생, 그리고 앞으로 의과대학에 들어올 학생들은 처음 진료 현장에 나올 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리고 임상의로서 살아가는 인생의 많은 부분을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진료하게 될 의사들이다. 이미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소위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이며, 의사로서 성장해서 인공지능 시대를 살아갈 ‘디지털 네이티브 의사’가 될 것이다.

이들은 디지털 네이티브로 태어났지만, 의과대학에서는 기존의 패러다임 기반의 교육을 받고 있다. 이들은 성인이 되기 이전부터, 혹은 태어날 때부터 아이폰, 아이패드, 유튜브, 인스턴트 메시지에 익숙하지만, 의대에서는 휴대폰, 디카, 복사기, 공중파 TV, 종이책에 익숙한, 혹은 여기에도 익숙하지 못한 세대가 만들었고, 그러한 세대가 제공하는 교육을 받고 있다.

특히, 현재 의과대학에 있는 예비 의사들은 일종의 샌드위치 신세다. 의학은 인공지능을 포함한 기술의 발전으로 패러다임의 변혁기에 도달해 있지만, 아직 의학 교육은 이러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의학 교육도 변화하겠지만, 그 속도는 너무 느리다. 또한, 교육 체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높은 교수들은 충분히 기민하지 못하며, 변화에 대한 동기도 부족하다. 따라서 현재의 의과대학 학생들은 그러한 교육 혁신이 일어나기 전에 교육 과정을 마치고, 의사 면허를 따고, 수련을 마치게 될 것이다. 즉, 이들은 기존의 패러다임 하에서 교육받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하에서 진료해야 하는 마지막 세대가 될 것이다. 인공지능과 관련해서는, 안타깝게도 결국 각자도생하는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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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참여했던 서울의대 예과 수업
이미 학생들은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필자는 2017년 11월 서울의대 의예과의 ‘의학 입문’ 수업의 일부를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조금 다른 방식으로 기획하고 학생들을 지도해본 적이 있다. 이 과목은 의예과 1학년 전체가 듣는 전공 필수 과목인데, 한 학기 강의 중에 2주 정도를 할애하여 뷰노, 루닛, 스탠다임 등 의료 인공지능 스타트업을 포함한 디지털 헬스케어 회사를 학생들이 방문하고, 이 회사들이 개발하고 있는 기술의 발전이 자신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해서 발표하는 시간을 가져본 것이다. 의외로 학생들은 (필자와 같은 기성 세대들의 걱정과는 다르게) 자신이 의사로 살아갈 미래에 인공지능 등의 기술이 큰 영향을 미치리라는 점을 잘 이해하고 있고, 이를 보다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려는 자세를 보였다. 또한 인공지능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던 학생도 상당수 있었다. 

의과대학의 커리큘럼은 매우 보수적이며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빠르게 바뀌지 않는다. 커리큘럼을 변화시킬 권한이 있는 교수들이 변화를 주저하면서 드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학생들이 그러한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학생들이 그러한 변화를 이미 잘 이해하고 있고, 새로운 교육을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교육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최소한 학생에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 시대 의사의 새로운 역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다른 많은 직업도 그렇듯이, 의사도 대학 때 배운 지식과 전공의 때 수련한 역량만으로 평생을 살아갈 수 있던 시대는 끝난지 오래다. 의사는 이제 평생 새로운 역할을 찾아 진화해야 한다. 사실 과거에도 의사의 역할은 기술의 발전에 따라서 바뀌고 진화해왔다. 하지만 지금처럼 기술 혁신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시대에 새로운 역할의 모색은 더욱 중요해졌고, 그 사이클은 계속 짧아지고 있다. 따라서 이제 의사는 지속해서 배우고, 새로운 역할에 적응하고, 계속 진화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 즉, 평생에 걸쳐 배우고 진화하는 의사(life-long learner), 새로운 기술과 환경에 적응력을 가진 의사(adaptable pratitioner)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플립 러닝, 의대 교육의 혁신

새로운 시대에, ‘평생에 걸쳐 배우고 진화하는 의사’, ‘새로운 기술과 환경에 적응력을 가진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는 더욱 중요하다. 이러한 측면에 최근 의학 교육에서 ‘플립 러닝(flipped learning)’이라는 방식의 교육 방법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하버드 의과대학이 플립러닝을 2019년부터 전면 도입하기로 하면서 전 세계 의과대학의 변화를 이끌고 있다 [1, 2, 3, 4, 5].

‘거꾸로 교실 (flipped classroom)’ 이라고도 불리는 이 플립 러닝은 기존의 수업과는 반대 방향으로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다. 교수는 예전처럼 일방적으로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강의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대신 학생들이 수업에 들어오기 전에 사전 제작된 동영상 및 과제를 통해서 먼저 스스로 학습한다. 수업 시간에는 소그룹으로 나뉘어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지식 적용 토론을 하고, 교수는 그런 토론을 지도하고 평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다른 의사들과 함께 토론하고, 의사소통하면서, 협업할 수 있는 능력도 함양하게 된다. 특히, 단순한 암기와 문제풀이에서의 ‘what’ 보다는 ‘how’와 ‘why’가 더 강조된다. 이러한 방식의 강의에서는 교수로부터도 배우지만, 학생들은 팀을 이룬 동료들로부터 주로 배우게 된다.

nejmp1706474_f1하버드 의대에서 시작된 플립러닝이 전세계 의과대학으로 확대되고 있다 (출처: NEJM)

의학 교육 전문가들은 전통적인 의미의 의학 교육은 이제 수명을 다했다고 단언한다. 사실 의대 교육에 이러한 플립 러닝이 도입된 것이 인공지능의 영향 때문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미국의 의대에서는 지난 30년 동안 일방적인 강의를 계속 줄여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의료 인공지능이 의사의 미래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인공지능 시대에 의사에게 요구되는 역량을 기르기 위해서는 플립 러닝과 같은 수업이 효과적일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연세의대 의학교육학 교실 전우택 교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의사가 지식을 습득하는 방식과 좋은 의사가 갖춰야 할 조건 자체가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유능한 의사는 많은 교과서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잘 기억하고 있고, 최신 논문에 발표된 연구 결과를 열심히 공부해서 알고 있고, 많은 개인적 임상 경험을 통해 ‘임상적 분별력과 지혜’를 가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료 인공지능의 발전은 이런 과거의 ‘명의의 조건’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교과서적 지식과 최신 연구 결과는 인공지능이 인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학습하고 암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대에 실력 있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 지식을 더 많이 암기하는 것보다, 새로운 지식을 스스로 어떻게 찾아내어서 학습하는지를 배우고, 자신이 배운 것을 다른 전문가들과 함께 토론하고 협업하여 답을 이끌어내고, 이렇게 변형된 지식을 현장에 적용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플립 러닝이 목표로 하는 바가 이러한 능력을 함양함으로써, ‘평생에 걸쳐 배우고 진화하는 의사 (life-long learner)’, ‘새로운 기술과 환경에 적응력을 가진 의사 (adaptable practitioner)’를 양성하는 것이다[ref].

또한, 이러한 플립 러닝은 지식의 학습 그 자체로도 새로운 ‘밀레니얼’ 혹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의대생에게 더욱 효과적이다 [ref]. 이들이 접하는 컨텐츠와 소통하는 방식 자체가 과거 세대와는 다르기 때문에 교육도 새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존의 교육 방식과 플립 러닝 방식의 결과를 무작위 대조연구를 해본 결과, 학생들은 플립 러닝 방식의 수업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많이 내는 것으로 드러났다. 더 나아가, 기존의 교육 방식에서 시험 점수가 낮던 학생들의 성적도 플립 러닝에서 유의미하게 개선되기도 했다 [1, 2].

다만 한국의 의과대학에서도 이러한 플립 러닝이 마찬가지로 효과적일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 토론보다는 암기를 해야 하는 비중이 높고, 학생이 주도적으로 학습하기보다는 학원과 과외 수업을 통해 강사가 떠먹여 주는 것을 받아먹는 것에 익숙한 것이 현실이다. 실제로 플립 러닝 방식의 수업을 선도적으로 시도했던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노태호 교수님은 한국의 의학 학생들이 이러한 교육 방식에 참여율이 높지 않았다는 경험을 밝히신적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의과대학과 가르치는 교수의 입장에서도 넘어야 할 산이 있다. 무엇보다 플립 러닝에는 돈이 든다. 학생들이 미리 배워올 수 있는 동영상 강의 등 새로운 유형의 교육 콘텐츠를 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기존의 교수도 토론 등 새로운 방식의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다. 따라서 교수를 재교육하거나 새로운 인력을 충원해야 하는데, 이 부분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기존 강의를 완전히 없애고 플립 러닝을 전면 도입한 버몬트 대학교 의과대학에서는 이를 위해 교수들을 수년 동안 교육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시대에 의사가 문제를 스스로 정의하고, 무엇을 어떻게 배울지를 주체적으로 결정하며, 지식을 학습하고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을 팀을 이뤄서 의사소통하고 협력하며, 계속 진화해나가는 방식을 배우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가능하면 이른 시일 내에 이런 역량을 길러주는 교육을 시작하는 것이 예측불허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미래의 의사뿐만 아니라, 미래의 환자를 위해서도 바람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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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헬스케어를 통해 의료를 혁신하고 세상을 더 건강하게 만들고자 하는 벤처투자자, 미래의료학자, 에반젤리스트입니다. 포항공대에서 컴퓨터공학과 생명과학을 복수 전공하였고, 동대학원에서 전산생물학으로 이학박사를 취득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 서울대학교병원 등에서 연구하였습니다. 현재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 전문 투자사, 디지털 헬스케어 파트너스 (DHP)를 2016년에 공동창업하였고,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여 개의 디지털 헬스케어 스타트업에 투자하였습니다. 네이처의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 자매지 『npj 디지털 메디슨』의 편집위원이자, 식약처, 심평원의 전문가 협의체 자문위원입니다. 『디지털 헬스케어: 의료의 미래』 『의료 인공지능』 『헬스케어 이노베이션』 등을 집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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